* '딸기잼'의 재판 수요조사를 위해 비공개처리했던 글을 다시 공개합니다.
작년 글을 다시 공개하는 것이라 실제 인쇄되었던 책과는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박사학위도 일찍 땄으니 안식년도 일찍 가지라고, 이 꼬마친구야.
공항에서 비행기 티켓까지 손에 쥐고까지서도 망설이던 그의 등을 떠밀며 가르시아는 말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다면 리드는 티켓을 쥔 채 다시 집으로 갔을 터였다. 그리고 다시 어김없이, 갈색 가방을 길게 메고 작은 행운을 빌며 짝짝이로 양말을 신은 채 인간 본성의 말로를 지켜봐야 하는 제 일터로 출근했을 거고. 그는 사실 비행기 안에서 영국 인류학자의 영국인 발견 - 리드의 짐을 다시 한 번 살피다 책의 제목을 본 모건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 을 읽으면서까지도 망설였다. 이 끈질긴 망설임은 그가 입국 수속을 다 마치고 공항을 나와 지하철을 타는 순간까지도 그의 뒤통수를 잡아당겼다. 좁아터진 튜브 속에서 유난히 긴 다리를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채이는 동안 이 망설임은 그에게 이제 속삭이기까지 했다. 이거 봐, 이거 봐. 여행은 너에게 맞지 않아, 리드.
그러나 끈질긴 망설임은 여자가 영국에 온 걸 환영해요, 스펜서. 라며 살갑게 웃자 혓바닥 위에 놓인 솜사탕처럼 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로써 리드가 모르는 게 두 개로 늘었다. 여자의 이름과, 망설임이 사라진 이유. 그러니까, 저 웃음이 좋은 이유.
그녀는 어깨에 얹고있던 두터운 회색의 목도리를 풀러 그의 옆에 멍청하게 서 있던 짐가방 손잡이에 묶었다. 이건 내가 끌게요. 무슨 짐이 이렇게 많아요?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여자는 리드의 짐가방을 끌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남은 짐을 챙겨든 그가 허둥지둥 그녀를 뒤따랐다. 가볍게 말린 머리칼이 심술궂게 찌푸린 런던의 하늘 아래서도 경쾌하게 흔들렸다. 런던은 뒤이어 누군가 '보이밴드 머리'라고 칭했던 짧고 곱슬곱슬한 머리칼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짙은 빨강의 이층 버스가 둘을 삼킬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시아는 치밀했고 다정했다. 리드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미국행을 다시 탈까 싶어 미리 에밀리에게 연락을 취해놓은 것은 물론, 에밀리네 바로 옆의 플랏을 미리 구해놓기까지 했다. 영국에서 이렇게 빨리, 원하는 대로 플랏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니, 혹시 가르시아에게 남자형제는 없나요? 여자가 감탄할 정도로. 그녀는 정말 당신을 좋아하나봐요. 오는 길 내내 은근한 자기 팀 자랑과 인간 행동 탐구에 대한 이론에 떠드는 리드를 놀랍게도 단 한번도 제재하지 않고 끝까지 흥미롭게 들어주며 문 앞까지 짐을 들어다 준 그녀는 문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을 보고 웃었다.
'리드, 런던에 온 걸 환영해! 저녁 일곱시쯤 올게. xxxxxxxxxx'
빨간 색으로 정신없이 x를 휘갈기다니, 에밀리가 놀리려고 단단히 마음먹은 게 틀림없네요. 당신, 에밀리의 밥이었군요? 부드러운 웃음을 얼굴 가득 지으면서도 황급히 포스트잇을 떼어버리는 리드를 보며 웃던 그녀는 아직도 불룩한 주머니에서 집 열쇠와 카드를 하나 건넸다.
- 여기, 집 열쇠랑 휴대폰 칩이에요. 전화번호는 카드에 써 있어요. 에밀리가 걱정하고 있을테니 전화 한 통 해주는 거 잊지 말고요.
- 고마워요. 어... 당신은 어디...?
아, 전 여기 살아요. 그녀가 리드의 플랏 옆에 위치한 문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 층은 외국인이 접수한 거죠. 세 집밖에 없긴 하지만. 여자가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그의 짐가방에 묶여있던 목도리를 풀렀다. 그러니까, 우리 이웃인거네요? 리드가 아주 멍청한 질문을 했다. 이웃은 사실 공동체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관계죠.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면서도 반면에 원하는대로 지속할 수도 또는 정리할 수도 있는 굉장히 흥미로운 관계인데...그의 이웃에 대한 이론을 들으며 주머니에서 열쇠를 하나 더 꺼내 - 아직도 주머니는 불룩했다 - 자기 플랏의 문을 연 여자는 다시 한번 살갑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 그 흥미로운 관계에 이제 내가 참가하게 된 건가요? 흠, 당신이 이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했으면 좋겠네요. 난 꽤 괜찮은 이웃인 거 같은데. 밤에 음악을 좀 틀긴 하지만요.
- 아, 전 사실 소리에 민감한 편은 아니에요.
다행이에요. 그럼, 이만. 가볍게 눈 인사를 건낸 그녀는 이윽고 문 속으로 사라졌다. 좋은 하루 되세요, 라는 말을 남긴 채. 짐가방에 둘러쌓인 리드는 잠시 굳고 말았다.
- 이름을 못 물어봤어...
애처로운 혼잣말과 함께.
저녁 일곱시에 에밀리와 반갑게 재회하고, 다음 날 대영도서관을 다녀오고, 그 다음날 대영박물관을 다녀오고, 그 다음다음 날 내셔널 갤러리를 다녀오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을까, 열흘이 지났을까? 모든 것을 사진처럼 명확히 기억하는 그의 기억력이 혼란스러워 할 정도로 그 날은 리드에게 충격적이었다. 그 날. 여자를 다시 마주친 그 날은.
사실 그 이후 완전히 처음은 아니었다. 여자는 은근히 보안에 무신경해 문을 열어두거나 창문을 열어두고 지내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았다. 컨버스를 여섯 켤레나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던가, 창가에 자개로 만든 윈드차임을 걸어놓고서도 가끔 짜증내며 치워버린다던가, 모국어로 떠들 때는 목소리 톤이 조금 더 올라간다는,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 늦은 밤이나 이른 아침, 아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아무 것도 분석할 필요가 없는 하루가 아득해 가만히 누워있다 보면 들려오는 어딘가 부딪히거나 걷어찬 듯한 소리, 혹은 바지런히 바닥을 두드리는 발자국 소리가 벽을 따라 들려오곤 해 리드는 혼자 웃곤 했다. 여자는 비밀스럽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혼자서 친분을 쌓아갔다. 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아주 친근하게 반가워요, 오랜만이에요. 그런데 이름이 뭐에요? 라는 말을 건낼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늦은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도서관에 가기 위해 플랏을 나와 계단 앞에서 신발을 고쳐 신던 리드는 복도를 울리는 부산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토스트를 입에 문 채 문을 잠그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가 손을 들어 인사를 건내려다 멈칫했다. 눈이 마주친 여자는 웃고 있지 않았다. 살가운 웃음이 지워진 얼굴은 길고 약간 처진 눈꼬리로 인해 나른하고 차가운 인상을 주었다. 머뭇거리는 그를 알아챈 그녀가 입에 문 토스트를 손에 옮겨 들었고 그제서야 리드가 인사를 건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러네요. 좋은 아침. 여자가 미소하곤 빠르게 계단을 내려갔다. 얼굴에 웃음기가 돌자 비로소 그 날의 여자처럼 살가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가 그 날의 여자와 다르다고 느꼈다. 이질적이었다. 뭐가? 그가 한참을 계단 앞에서 고민하다 깨달았다.
그녀는 그를 아주 생소한 사람을 보듯 바라보았다.
마치 한번도 만난 적 없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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